현대중공업·한화 등 재벌 3세의 초고속 승진, 경쟁 없는 ‘금수저’는 수만 명 책임질 수 있나

32살과 33살에 대기업 전무가 되는 것. 한국 대기업에서 가능한 이들은 딱 한 부류다. 재벌 총수의 아들이거나 딸이다.

올해 말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씨의 아들 정기선(33)씨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아들 김동관(32)씨가 전무로 승진했다. 삼성그룹에서만 수백 명의 임원 자리가 없어지는 등 경기불황에 이은 인사 한파도 이들을 피해갔다. 그들은 무풍지대에 있었다.

현대중공업의 정기선 전무는 지난해 수석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한 데 이어, 1년 만인 지난 11월27일 전무 자리에 올랐다. 정 전무는 2009년 현대중공업 입사 뒤 미국 유학을 떠났고, 2013년 회사에 재입사했다. 지난 12월6일에는 한화그룹 김동관 전무도 2014년 상무에 오른 지 1년 만에 바로 전무 명패를 찍었다. 김 전무는 2010년 한화에 입사해 한화큐셀 등 한화그룹의 태양광 사업을 맡고 있다.

정씨와 김씨가 1년 만에 전무로 오르는 ‘초고속 엘리베이터’ 승진은 이전 재벌가 총수 자녀의 승진보다 빠르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해 <한겨레>가 국내 주요 15개 그룹 재벌 3세 28명의 평균 첫 임원 승진 나이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들이 ‘기업의 별’인 임원 직함을 단 나이는 평균 31.2살이었다. 10년 전인 2005년 조사에선 국내 12개 그룹 재벌 3·4세 36명의 첫 임원 승진 나이가 평균 32.8살이었다. 경제민주화 바람이 분 지 10년이 흘렀어도 재벌들은 여전히 정기선 전무와 김동관 전무 같은 총수 자녀들을 30대 초반에 임원으로 앉히고 있는 것이다.

재벌 3세 첫 임원 승진 나이 3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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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직장인과는 비교조차 무의미하다. 일반 직장인의 경우 ‘첫 별’인 상무를 다는 평균나이는 51살이다. 운 좋게 상무가 될 확률은 열심히 회사를 다녀도 0.87%밖에 되지 않는다(CEO스코어 조사결과). 30대 초반에는 보통 대리나 과장급이다.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의 직급이 한 단계 오를 때마다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대표적인 두 기업의 후계자라는 사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이 경영을 과연 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은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0년 뒤인 2001년 상무보를 달았다. 전무(2007년)가 된 것도 2003년 상무로 승진한 지 4년 만이었다.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의 경우는 이재용 부회장보다 빨랐다. 정의선 부회장은 1994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뒤 2001년 상무로 승진했다. 2002년 전무가 된 뒤 3년 만에 2005년 기아자동차 사장이 됐다. 둘 다 임원이 되기 전 10년 가까이 회사 생활을 경험했다.

그러나 총수 자녀의 초고속 승진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는 갈수록 잦아들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승진 엘리베이터에 오른 정기선 전무와 김동관 전무는 사회적 주목을 받지 않았다. 현대중공업과 한화는 올해 인사에서 첫 여성 임원을 ‘공교롭게도’ 배출해, 이들이 더 주목받기도 했다.

상무·전무·부사장 점프는 당연한가

여론이 이들의 초고속 승진에 둔감해진 것일까. 올해 한국 사회를 강타한 ‘흙수저-금수저’론은 불공평한 현실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부모의 재산이 없고 학력과 스펙(영어점수·경력 등)이 변변치 못한 이른바 ‘흙수저’가 집안의 지원이 튼튼한 ‘금수저’를 취업이나 결혼 시장에서 따라갈 수 없다는 자조가 번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송 드라마에서 젊은 재벌 아들이 ‘기획실장’으로 나오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재벌 총수가 있는 기업에 다니는 한 30대 회사원은 “우리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순종적이다. 나이 어린 총수 자녀들이 낙하산처럼 위로 꽂혀와도 그냥 받아들인다. 그들이 회사의 주인이니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들은 ‘수저’가 다르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고용 규모는 4만3287명(2014년 기준)이다. 한화그룹의 고용 규모 역시 3만4055명에 이른다. 수많은 직원의 생계가 달려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전과 달리 세계적인 경쟁에 노출돼 있다. 이전 세대 창업주처럼 국내에서 시행착오도 하고, 특혜를 받아 몸집을 불리고 세계로 나아가던 시대와는 180도 달라졌다. 애플의 팀 쿡 회장, GE의 제프리 이멀트 회장 등 세계적인 경영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런 환경을 맞이할 그들의 능력은 어떨까. 정기선 전무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땄다. 이후 경영컨설팅 회사를 거쳐 현대중공업에 재입사했다. 현대중공업의 한 직원은 “정 전무는 겸손한 자세로 일하는 게 눈에 띈다”고 전했다. 현대중공업은 이번 인사에 대해 “정 전무는 조선과 해양 영업을 통합하는 영업본부의 총괄부문장을 겸직해 영업 최일선에서 발로 뛰며 수주 활동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김동관 전무도 유학파다. 김 전무는 미국 하버드대학을 나왔다. 주변의 평가는 나쁘지 않다. “김 전무는 운동할 때도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능력이 있다는 평도 받았고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한화 분위기와 맞아 잘 이끌 수 있을 것이다”라고 김 전무를 아는 한 주변 인물이 평했다. 한화그룹은 김 전무를 승진시킨 것에 대해 “올해 한화큐셀이 3분기 매출 4억2720만달러, 순이익 5240만달러로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공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늙어가는 한국 기업 바꿀 수 있을까

4대 그룹의 전략 부문에서 일했던 김아무개씨는 30대 임원의 등장에 대해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한국 기업 조직은 생각보다 경직돼 있다. 시스템상 50대를 넘어야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 있어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젊은 재벌 3·4세로 승계가 될 때 경영진이 세대교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재벌 3·4세를 초고속 승진시키는 것은 이들에게 독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크다. 첫째, 빠른 승진은 빠른 실패를 할 가능성이 크다. 경험이 없는 경영자가 시행착오를 겪은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우, 경영에 나섰던 초기인 2000년대 초반 ‘e-삼성’ 사업이 실패로 끝났다. 이 사업의 실패는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도 30대 초반에 임원이 된 뒤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한 ‘땅콩 회항’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현재 재벌 3·4세에 대한 평가도 이를 반영한다. 올해 3월 경제개혁연구소가 교수, 연구자, 애널리스트 등 전문가 50명에게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능력을 물은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평가 대상자 11명에 대한 평균점수는 35.79점(100점 만점)에 불과했다. 1등은 롯데그룹의 신동빈 회장, 2등은 두산그룹의 박정원 부회장, 3등은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부회장이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세창 부사장(34.35점)과 효성그룹의 조현준 사장(30.05점), 대한항공의 조원태 사장(18.65점)은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올해 초 실시한 조사라 최근 롯데그룹의 경영권 다툼은 평가에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재벌 3·4세의 ‘낙하산’ 승진은 내부에서 경영능력 검증을 거치지 못해 리더십에 대한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재벌 기업에 다니는 또 다른 30대 회사원은 “재벌 자녀들은 입사할 때부터 ‘언젠가는 분명 사장이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일을 잘한다 못한다 아무도 평가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솔직한 평가를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직원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낙하산’은 회사 내 새로운 파벌을 만든다. “재벌 총수 자녀가 바로 임원으로 오면 그만큼 회사 내 공정성이라는 게 드라마틱하게 깨진다. 회사 내에 별도의 룰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다. 자녀 밑으로 라인이 생기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진다. 회사 직원에게 필요한 주인의식과 열심히 일할 동기를 떨어뜨린다.”(대기업 직원 김아무개씨)

“특별대우가 아닌 평가와 검증이 당연”

미국에서 사업을 크게 일으킨 기업가 김승호 회장은 <한겨레21>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 대화를 통해, 한국 재벌의 승계 문화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최근 직원에게 고객이 무례한 ‘갑질’을 할 수 없게 한 ‘공정서비스 권리 안내문’을 내걸어 화제를 모은 도시락 카페업체 스노우폭스의 모회사 짐킴홀딩스의 대표를 맡고 있다.

“(재벌의 경영권 승계가) 효율성 문제를 떠나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벌 자녀라 하더라도 체계적인 경영수업을 받고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와 검증을 거쳐야만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김 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세계 11개국 1250개 매장, 임직원 4천여 명의 회사를 키워냈다. 경영이라면 이골이 났을 그는 “대기업처럼 수많은 주주와 종업원이 있는 회사는 더욱 엄격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필요하다. 이것이 회사의 경쟁력을 키우고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바람직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사회와 기업이 잊고 지내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