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짜 원하는 걸 찾아라, 그럼 실패도 두렵지 않단다 의대 그만두고 7개월 노숙한 아들 안 말려 도시락 전문점인 스노우폭스 강남점에서 만난 김 회장, 매장 문에는 얼마 전 화제가 됐던 ‘공정서비스 안내’가 붙어있었다. ‘직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고객은 내보내겠다’는 내용이다. 사업 실패 후 홀로 미국으로 간 아버지는 빌딩 청소부가 됐다. 가족들과 재회하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100일간 의자에 앉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 결심을 지켰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었지만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가족과 함께 살 준비를 했다. 7년 후 불법체류자 전면 사면으로 영주권을 얻은 아버지는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그때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은 30여 년이 흐른 후 매출 3500억원, 자산 4000억원을 소유한 기업인이 됐다. 11개 나라에 120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재미 기업인 짐킴홀딩스(JFE) 김승호(51) 회장이다. 김 회장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를 100일 동안 100번 쓴다. 그러면 길이 보인다. 가족은 그의 가장 큰 힘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 나를 믿어주셨어요. 제가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한결같이.” 매출 ‘0’…15년 전 또 회사를 접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일하는 식료품 가게에서 담배를 팔았다. 그 후 20년간 컴퓨터 조립 회사, 증권거래 회사, 지역 신문사, 이불 가게, 유기농 식품점 등 다양한 사업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김 회장은 “이민 후 20년간은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2000년에 운영하던 유기농식품 회사가 실패했을 땐 많이 울었다. 매장을 할부로 인수하고 다달이 갚는 오너 파이낸싱 방식으로 건강식품 매장을 인수했다. 직원 수가 50명이 넘는 꽤 큰 매장이었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고 소비 심리가 추락하면서 매출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탈모증까지 생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후 매장 앞 도로 확장공사가 시작됐다. 절반으로 떨어진 매출액이 다시 0을 기록했다. “망하기 이틀 전, 아버지가 현금 5000달러를 봉투에 담아 들고 오셨어요. 어머니가 미국에 온 후 조금씩 모았던 비상금이었죠. 아버지는 내일 닫을지 오늘 닫을지 모르는 회사의 고장 난 문고리를 고쳐야겠다며 장도리를 들고 오셔서 직접 문고리를 수리하셨어요.” 결국 직원들에게 마지막 급여를 주고 회사 문을 닫던 날, 아버지는 담담하게 ‘기운 내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 가족이 미국에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았냐. 몸만 상하지 않으면 됐다. 그간 먹고 살아온 게 번 거다”라며 아들을 위로했다. 선생님의 작은 관심, 나를 바꾼 삼중당 문고 어린 시절 김 회장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고, 학교에선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달라진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다. 그에게 관심을 가져준 담임 정진호 교사 덕분이었다. “어느 날 등굣길 버스 안에서 삼중당 문고 한 권을 주웠어요. 이광수의 『사랑』이었죠. 그 책을 책상 위에 올려뒀는데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교무실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혼날 때 말고 다른 일로 교무실에 간 건 그게 처음이었어요.” 그에게 정 교사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삼중당 문고 중 추천할 만한 책을 적은 종이였다. “초·중·고교를 통틀어 나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 준 최초의 선생님이셨죠.” 종이 위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 『금강경』 『사회계약론』 등 121권의 도서 목록이 적혀 있었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 없던 소년은 그때 이후 달라졌다. 1년 동안 그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다. 책을 읽다 보니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생각의 폭도 넓어졌다.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자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선생님의 사소한 관심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거예요. 미국에 이민 올 때도 이 책들은 챙겨왔어요.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죠.” 그때부터 현재까지 그는 지독한 독서광이다. 아무리 바빠도 매년 약 60권의 책을 읽는다. 집에도 소파, 화장실, 침대 머리맡 그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책이 있다. 출장길에도 반드시 책을 챙긴다. 그는 ‘아들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글로도 유명하다.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과는 동업하지 말거라,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 가까운 친구라도 남의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속을 보이지 말아라, 그 사람이 바로 너의 흉을 보고 다닌 사람이다 / 너의 자녀를 키우며 효도를 바라지 말아라, 나도 너를 키우며 너 웃으며 자란 모습으로 다 받았다’ 등 그가 2002년 썼던 아들에게 주는 말 26가지는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파트너 때문에 망한 적이 있어요. 내가 살면서 느끼고 알게 됐던 것들을 세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이 내용은 후에 책 『아들에게 주는 교훈』(개정판 『자기경영 노트』)으로 출간됐다. 그는 “사소한 시간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이 사업상 중요한 약속을 지킬 리 만무하다”며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는 의미이자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말했다. 김승호 회장이 세 아들에게 쓴 편지. 이 편지의 내용은 2002년 ‘아들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후 이 내용은 동명의 책 『아들에게 주는 교훈』(개정판 『자기경영 노트』)으로도 출간됐다. 그 내용 중 일부를 김 회장이 직접 손으로 써서 강남통신에 보내왔다. 풍족하게 키우는 대신 꿈을 키워줘라 –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했다. 어떻게 실패를 극복했나. “좌절할 때마다 걸었다. 걷다 보면 기운이 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면 또다시 시작할 힘이 생긴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면 무조건 나가서 매일 한 시간씩 걸으라고 조언한다. 걸을 기력조차 없겠지만 그럴수록 더 걸어야 한다. 나도 실패한 후 그렇게 걸었다. 걷다가 눈에 띈 게 지금 운영하는 글로벌 식품회사인 JFE의 모체다. 무작정 사장을 찾아가 내가 당신보다 영업을 더 잘할 듯하니 내게 넘기라고 했다. 슈퍼마켓 안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스시를 파는 회사였다. 당시에는 작은 회사였는데 40억원을 달라더라. 나는 일단 텍사스 판권을 요구했다. 그게 6억원 정도였다. 아내가 모아뒀던 230만원을 주고 매달 5000만원씩 갚겠다고 수표를 끊어줬다. 인수한 텍사스 내 매장들을 임대해서 임대 수익으로 매달 5000만원씩 8개월만에 6억원을 갚았다. 그러면서 그중 한 개 매장에서 한국식 덮밥과 스시 등 동양 음식으로 구성된 도시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도시락 가게를 각 임대 매장마다 운영토록 해서 프랜차이즈화했다. 그러면서 사업이 급속히 확장됐다. 현재의 도시락 전문점 ‘스노우폭스’의 전신이다. 사업할 때 무조건 자본금이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 100일간 동안 100번 쓰기를 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나. “진정으로 바라는 목표가 생기면 100일간 매일 100번씩 쓴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8번을 했는데 8번 모두 성공했다. 쓰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목표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목표가 아니다. 간절히 원하는 목표는 쓰다 보면 방법이 보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우리는 누군가의 상상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건물, 휴대전화, 자동차 모두 누군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상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고 남의 상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인수하고 싶은 매장이 있으면 매일 아침 매장 앞에서 “저건 내 거다”를 100번씩 외친다. 미국 지도를 사서 점 300개를 무작위로 막 찍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메일 패스워드를 ‘매장 300개’로 정했다. 이메일을 쓸 때마다 내 꿈을 다시 적어보려는 거였다. 5년이 지나니까 정말 300개 매장이 됐다. 또 다른 습관은 매년 명함 만한 종이에 목표를 적곤 한다.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며 외친다. 1년쯤 지나서 보면 적어도 3분의 2는 이뤄져 있다. 그러면 지우고 또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지금 목표는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400대 부자가 되는 거다. 또 다른 목표는 주변 사람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어주기다. 이 목표를 위해 한국의 사업가들과 성공 비결을 많이 나누려고 한다.” 그는 아들 셋을 뒀다. 집에서 항상 책을 보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아이들 역시 책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주말마다 함께 캠핑을 다녔다. 그때 다져진 부모와 세 아들의 유대감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큰아들은 26세, 둘째는 24세, 막내아들은 18세다. 그는 세 아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믿어주고 인정한다. 뉴욕대 의대를 다니던 큰아들이 6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때도, 대학을 졸업하고는 1년간 거지 생활을 하겠다고 할 때도 그러라고 했다. – 거지로 살겠다는 아들을 왜 그냥 뒀나. “왜 거지가 되고 싶으냐 물으니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아들은 7개월 동안 거지 생활을 했다. 지하철에서 노래 부르고 노숙하고 그러면서 살았다더라. 그러다가 ‘이렇게 해서 먹고 사는 건 아니구나,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를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은 뉴욕에서 친구들과 사업을 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럴 때는 기다려줘야 한다. 꿈이 생기기 전까지는 대부분이 게임이나 하고 친구들하고 돌아다니고 그런다. 부모는 아이가 꿈이 생기려고 할 때 그 꿈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 둘째 아들은 세계 3대 요리학교인 일본 츠치요리학교에 다닌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요리를 배우겠다고 일본으로 갔다. 낮에는 학교 가고 밤에는 일식집에서 막내 보조 요리사로 일한다. 일을 너무 좋아해서 법정 아르바이트 시간인 3시간만 돈을 받고 나머지는 무료로 자기가 좋아서 일을 배우고 있다. 막내는 고등학생이다. 아직 진로를 명확하게 정하진 않았는데 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 – 부자 아버지에 대해 아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아이들 어릴 때는 계속 사업이 망했으니 풍족하게 키울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도 학비 외의 용돈은 직접 벌어서 쓰도록 했다. 경제 관념을 어렸을 때부터 심어주려고 했다. 큰아이는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에게 빌려 간 학비를 매달 갚아나가고 있다. 사실 아이들은 내가 얼마를 버는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작은 집에서 계속 살았는데 아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2008년에 큰 집을 사달라더라. 결혼하고 뭐 사달라는 말이 없던 사람이라 군소리 없이 사줬다. 휴스턴에서도 손꼽히는 저택이다. 그 집을 사고 나니 아이들이 ‘우리가 이런 집에 살아도 될 정도로 부자냐’고 묻더라. 얼마 전에는 고교생인 막내가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집에 왔던 모양이다. 친구가 ‘너 왜 여기가 너희 집이라고 말 안 했어’라고 물어서 ‘그걸 왜 말해야 해’라고 되물었다고 하더라. 셋 다 나처럼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 덕을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첫째와 둘째가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뛰어넘는 사업가가 될까를 놓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 아들에게도 목표하는 걸 100번씩 쓰도록 하나. “아니다. 그 아이들이 원하면 모를까. 어떤 것을 해보라고 권해본 적이 없다. 원하지 않는데 하라고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겠나. 내가 100번 쓰기를 말하면 가끔 남편의 사업, 아들의 진로에 대해 100번씩 써도 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건 남편이나 아들의 꿈이지 자신의 꿈이 아니지 않나. 왜 자기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려고 하나.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꿈과 희망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내 아들에게도 자신들이 원하는 게 아니면 그 무엇도 권유하거나 제안할 생각이 없다.” – 아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고의 유산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는데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학교에 들어가든, 어떤 직업을 갖든 중요한 건 스스로 생각하는 거다. 독서를 통해 생각하는 능력을 얻게 되면 어떤 문제나 실패 앞에서도 당당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꿈을 꾸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미국 이민 후 20년간은 끝없는 실패의 연속
매일 100번씩 목표를 쓰면 결국 이뤄지더라
11개국 1200여 개 매장 운영하는 식품회사 키워
부모의 꿈을 주입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다시 일어서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는 자금 부족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장남인 김 회장이 16세였던 1980년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김 회장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러다 대학 3학년 때인 87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한국에서 먹고 살기가 막막했어요.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사업하고 싶은데 하는 방법도 없을 것 같아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행을 선택했죠.”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아내의 무릎에서 소리 내 울었죠. 그랬더니 아내가 ‘괜찮아. 또 해봐. 내가 식당 종업원이라도 해서 애들하고 먹고살면 돼’라고 하더라고요. 엉엉 울고 다시 시작했어요.”
‘공정서비스’ 김승호 회장의 자녀 교육, 네가 진짜 원하는 걸 찾아라중앙일보
[최고의 유산] 재미 기업인 김승호 짐킴홀딩스 회장 가족 – 중앙일보